중국 산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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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상품 기본정보
여행출발일 2025년 09월 17일 여행도착일 2025년 09월 25일
가격
여행신청 여권사본 및 계약금
여행문의 TEL 02)734-1800 / FAX 02)734-7900
포함
항공 및 공항세&유류할증료/숙박/식사/전용차량/입장료/가이드 및 인솔자/여행자 보험/각종 팁
불포함 개인비용 외 없음

• 첫 번째 테마 : 중국의 원류를 찾는 여행

 중국 사람들은 늘 이상적인 시대로 요순(堯舜) 때를 꼽습니다. 우(虞) 임금에 이르러서는 황하의 치수에 성공,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 왕조를 세웁니다. 이것이 중국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무대가 우리가 여행 할 산서성입니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아주 오랜 기간 산서성을 중심으로 펼쳐졌습니다. 산서성은 중원의 핵심으로 황제가 정통성을 갖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차지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현대를 보려면 상해를, 중국의 근대 5백 년을 보려면 북경을, 중국의 5천 년 역사를 보려면 산서성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산서성 여행은 곧 중국의 원류를 향한 여행입니다.
 
 
• 두 번째 테마 : 문화의 충돌과 융합이 빚어 낸 유적들

 산서성은 농업과 유목의 경계선입니다. 산서성 북쪽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이민족의 땅이었습니다. 한족들이 오랑캐라고 불렀던 이들은 소위 말이 살찌는 가을이 되면 먹을 것을 찾아 산서성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한족과 오랑캐는 대개 안문관에서 목숨 건 승부를 벌였습니다.
간혹 안문관을 돌파한 다음 아예 중국에 왕조를 세운 오랑캐도 나왔습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그렇습니다. 이들은 주류인 한족을 회유하기 위해 산서성에 수많은 불교와 도교 사찰을 세웠습니다. 산서성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상업의 발달을 불러왔고, 부를 축적한 거상들 또한 많은 위대한 유산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우리는 운강석굴과 현공사, 안문관, 면산, 불궁사석가탑, 왕가대원, 평요고성 등에서 문화의 충돌과 융합이 만들어낸 유적들을 살펴봅니다.    
 
• 세 번째 테마 : 원래 모습 그대로의 여행지

 경제가 발전하고, 관광산업에 눈을 뜨면서 중국의 많은 여행지들은 지나친 상업화로 본 모습을 잃은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산서성의 유적들은 정말 놀라우리만치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최근 복원 작업을 새로 마친 안문관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거의 변화가 없다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세력의 각축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최근의 산서성이 예전과 달리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는 점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산서성에서 역사의 무게감이 흐르는, 원형 그대로의 여행지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날짜

방문지

교통편

시간

일정 내용

1

인천

대동

 

 

국제선

 

 

 

 

 

인천국제공항 출발

경유지 도착

경유지 출발

대동 도착 후 호텔 투숙

호텔 :

2

운강석굴

현공사

불궁사

석가탑

버스

전일

세계문화유산이자 중국의 3대 석굴 중 하나인 운강석굴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1500년 된 사찰 현공사

1천년이 넘은 중국 최고의 목조탑 불궁사 석가탑(응현목탑)

호텔 :

3

안문관

진사

버스

전일

만리장성에서 가장 험준한 요새이자 5A급 여유경구 안문관

무려 1300년 간 증축해온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당 진사

호텔 :

4

쌍림사

평요고성

버스

전일

2천여 점의 채색 진흙 조각으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쌍림사

500년의 역사가 완벽하게 보존된 평요고성

- 중국최초 은행인 일승창

- 현서 옛날 관청

- 명나라 성벽에 올라 평요고성 전경 조망

- 성황묘, 명청거리 자유 산책

- 평요인상디너쇼

호텔 :

5

면산

버스

전일

한식이 유래한, 거대한 공중도시 면산

- 절벽에 세운 거대 도교 사원 대라궁

- 면산의 대표 사찰 운봉사

- 12명의 등신불이 안치된 정과사

- 멋진 트레킹 루트와 전망을 갖고 있는 서현곡 풍경구

- 한식을 유래시킨 개자추의 사당 개공사

호텔 :

6

왕가대원

황하

호구폭포

버스

전일

민간의 자금성이라 불리는 거상의 대저택 왕가대원

황하의 심장이라는 불리는 세계 최대의 황색 폭포 황하호구폭포

호텔 :

7

황성상부

정주

버스

전일

강희제가 두 번이나 머문 명재상 진정경의 거대한 가택 황성상부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로 이동해 호텔 투숙

호텔 :

8

정주

인천

국제선

 

정주 출발

인천국제공항 도착

 

※ 상기 일정은 항공스케줄과 현지사정에 의해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제 1일   인천 - 대동

  이번 여행의 첫 기착지인 대동(大同)은 인구 3백만 명을 가진, 산서성(山西省) 제 2의 도시입니다. ‘길을 가다 한 삽 뜨면 모두가 석탄’이라고 할 정도로 대동은 광산업으로 번영을 누려왔습니다. 대동은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기도 합니다. 대동은 서기 398년 북위(北魏)의 수도였습니다. 우리의 방문지인 운강석굴이 대동의 대표적인 여행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대동 가는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직항편이 없습니다. 텐진을 거쳐 오후에 대동에 도착한 후 저녁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합니다.




제 2일   운강석굴 - 현공사 - 불궁사석가탑

  대동과 그 인근에는 유난히 불교와 도교 유적이 많습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이곳에서 나라의 기틀을 잡았는데, 이들이 중국의 주류인 한족과 정치적 동화를 이루기 위해 한족의 종교를 대대적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오늘의 방문지들은 모두 깜짝 놀랄만한 예술적 아름다움과 스케일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동거리와 예상 소요시간

대동-운강석굴 40분(20 km)
운강석굴-현공사 1시간 30분(97.0 km)
현공사-불궁사석가탑 60분(58 km)

 


 

•  운강석굴


 

  운강석굴(云冈石窟)은 대동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무주산(武周山) 기슭을 따라 1km에 걸쳐 크고 작은 석굴 252개에 총 51,000여 개의 불상이 있다. 운강석굴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국가 5A급 여유경구로도 지정되었다.
운강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낙양의 용문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손꼽힌다. 이 3개의 석굴은 모두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막고굴은 최고의 석굴 예술로 치지만 개방하는 굴이 극히 한정적이다. 용문석굴은 석굴의 개수와 규모가 최고지만 문화 혁명기에 너무 많은 파괴를 당했다. 반면 운강석굴은 보존 상태가 가장 좋고, 가장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운강석굴은 북위 때인 460~525년까지 65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당시 북위의 황제는 이민족이었던 만큼 정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불교의 힘이 필요했다. 이때 내세운 것이 ‘황제는 여래(如來)와 같다’는 슬로건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북위 조정은 운강석굴 조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곳의 불상을 부처와 황제가 섞인, 하나의 모습으로 표현해냈다.
동쪽에서 시작되는 석굴에는 각각의 번호가 매겨져 있다. 시대 순이 아니라 발굴 순이다. 그 중 1번에서부터 20번까지의 굴이 눈여겨 볼만 한데, 특히 5,6번, 7,8번, 20번 굴이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5번 굴은 높이가 17m로 이곳에서 가장 큰 석가모니 좌불상이 있다. 6번 굴은 보존상태가 완벽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유명하다. 7번 굴은 6명의 아름다운 보살상이, 8번 굴은 힌두교의 신상들이 인상적이다.
20번 굴은 운강석굴의 상징이다. 높이가 13,7m에 달하는 ‘노천대불(露天大佛)’이 이곳에 있다. 원래 있던 굴이 무너지면서 외부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인데 엷은 미소를 띤 자애로운 대불이 여행자들을 사로잡는다.

 

 

 

•  현공사


 

  현공사는 90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사찰이다. 중국의 오악(五岳)으로 이름난 항산(恒山)의 금용협(金龍峽) 협곡에 위치해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悬空寺라는 이름 자체가 ‘공중에 매달린 절’이란 뜻이다. 현재 현공사의 높이는 바닥에서 약 60m이다. 세월이 흐르며 계곡에 흙과 모래가 퇴적된 탓인데, 처음에는 8-90m 높이였으니 그 장엄함이 더욱 대단했을 것이다.
735년 당(唐)나라의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현공사의 기막힌 모습에 놀란 이태백은 결국 시 한수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바위에 '장관(壯觀)'이라고만 새겨놨다. 그리고 못내 아쉬웠던지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하듯 壯자 옆에 점 하나 더 찍었다 한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현공사는 무려 1,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뎌왔다. 현공사는 북위 시대인 491년 도교의 최고 지도자인 구겸지의 유언에 의해 도교사원으로 지어졌다. 항산(恒山)은 아주 오래전부터 신선들이 모여 사는 도교의 성지였다.
현재 우리가 보는 현공사는 명청(明淸) 시대에 개보수한 불교사찰이다. 얼핏 보면 가느다란 나무 기둥 몇 개가 건물의 하중을 온통 견뎌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기둥들은 그냥 보조일 뿐이다. 바위 속에 깊숙이 박아 놓은 대들보들을 연결해 하중을 골고루 배분시킨 다음 그 위에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이 오랜 세월을 끄떡없이 지탱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여 칸에 이르는 사찰에 올라 아래를 보면 삐거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찔해서 오금이 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불궁사석가탑

  

  불궁사석가탑(佛宫寺释迦塔)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목탑이다. 1056년 요나라 때 세워졌으니 거의 1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운강석굴이 있는 대동시에서 약 70km 떨어진 응현에 위치, 보통은 응현목탑(应县木塔)이라고 불린다.
응현목탑은 높이가 자그마치 67.13m에 하단부의 직경 둘레가 30.27m이다. 밖에서 보면 8각 모양의 5층탑이지만, 실제로는 8각 9층 목탑이다. 각 층마다 외부에선 볼 수 없는 암층(暗層)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 목탑을 짓는 데는 약 2,600t이 넘는 잣나무가 사용되었으며, 탑 안에는 귀중한 석가모니불의 치아 사리 2점을 모시고 있다.
응현목탑의 가장 큰 특징은 못과 쇠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하앙식공포(下昻式拱包) 구조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선 완주 화암사의 극락전이 이 방식의 유일한 건축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현목탑은 잦은 지진과 벼락을 견디며 1천여 년을 굳건히 견뎌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응현목탑은 피사의 탑처럼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때문에 보존과 안전을 위해서 관람객에게 2층까지만 공개한다. 사원 내부는 촬영 금지다.






제 3일   안문관 - 진사

  산서성은 농업과 유목의 경계선입니다. 산서성 너머는 한족 입장에선 그야말로 오랑캐의 땅이었습니다.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 사이의 치열한 다툼이 이 땅에서 벌어졌고, 그 첨예한 현장이 안문관입니다.
오후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사당인 진사를 보게 됩니다.

오늘의 이동거리와 예상 소요시간

불궁사석가탑-안문관 1시간 10분(75 km)
안문관--진사 2시간 40분(201 km)



•  안문관


 

  안문관(雁门关)은 만리장성의 가장 험한 관문 중 하나로 '중화제일관(中华第一关)'이라 불린다. 안문관은 해발 1,000m가 넘는 준봉들이 좁고 험한 협곡을 이루는 안문산에 있는데 “기러기도 넘지 못하고 협곡 가운데로 날아 지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얼마나 험한지 안문관을 한 장정이 막아서면, 만 장정도 지날 수 없단다.
이곳에 천하요새를 둔 이유는 안문관을 경계로 농경생활을 하는 한족과 유목 생활을 하는 북방민족이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유목민들이 먹을 것을 약탈하기 위해 남침했다. 이를 막기 위해 한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장성을 세우고, 방어를 위한 보루와 봉화대를 세웠다.
안문관을 사이에 두고 공수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기록에 의하면 20년에 한번 꼴로 무려 150여 차례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때문에 안문관의 수비는 대대로 내로라하는 명장들이 맡아 왔다. 그 중에는 후에 당나라를 세운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도 있다. 그는 16세 때 이곳에서 돌궐의 포위에 위기를 맞은 수양제(隋煬帝)를 구해낸 사실이 역사에 남아 있다.
천하제일의 요새인 안문관은 평화 시에는 수많은 서역의 대상들이 진귀한 물건들을 가득 싣고 드나들던 교통의 요지 역할을 했다. 모택동(毛澤東)도 이곳을 지난 유명인사 중 한명이다. 그는 대장정 중 한겨울에 안문관을 지났는데 '심원춘(沁園春) 설(雪)'이라는 친필 시비를 입구에 남겼다.
중국은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 최근 대대적인 재정비를 거쳐 국가 5A급 여유경구로 지정하였다.



• 진사


 

  태원에 왔다면 진사(晋祠)는 꼭 봐야한다. 진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종사(宗祠, 일족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다. 춘추 시대의 진(晋)나라를 세운 당숙우(唐叔虞)와 그의 어머니인 읍강(邑姜)을 기려 5세기 북위(北魏) 시대 때 세웠다. 읍강은 강태공으로 유명한 강자야(姜子耶)의 딸이다.
이후 18세기까지 1,300년 동안 지속적인 보수와 증축이 이뤄졌다. 단일 사당으로선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이 덕에 진사는 수많은 전각과 정원, 연못, 정자, 수로, 아주 오랜 고목이 어우러져 규모와 아름다움 면에서 궁궐을 방불케 한다. 크기만 해도 우리 덕수궁의 1.6배에 달한다.
진사 내에서도 꼭 봐야할 ‘진사 삼절(晋祠三绝)’이라는 하이라이트가 있다.
우선 성모전(圣母殿). 바로 읍강을 위한 사당이다. 회랑과 처마를 떠받든 기둥이 건물 전체를 지탱할 뿐, 사당 안에는 단 하나의 기둥도 세우지 않은 독특한 공법으로 유명한 건축물이다. 송나라 때 만들어진 42개의 채색 시녀 토우(土偶)도 무척 독특하다.
다음은 난로천(难老泉). 산서성의 주요 수원(水原) 중 하나인데, 예전에는 자연적으로 맑은 샘이 솟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인공적으로 물을 대고 있다. 마지막은 주나라 때 심은 측백나무다. 나이가 무려 3,000년이다. 나이 들어 지금은 45도 각도로 쓰러져 자라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이 외에도 진사에는 1,000~2,000년 된 고목들이 수두룩하여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제 4일   쌍림사 - 평요고성

  오늘의 여행지인 쌍림사와 평요고성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쌍림사가 갖고 있는 독특한 채색조각 예술을 먼저 감상한 후 명청 시대의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평요고성에서 시간 여행을 합니다.

오늘의 이동거리와 예상 소요시간

진사-쌍림사 1시간 20분(86  km)
쌍림사-평요고성 15분(7 km)



• 쌍림사


 

  평요고성 근처에는 아주 특별한 사찰이 있다. 쌍림사(双林寺)다. 자그마한 절이지만 평요고성과 함께 당당히 세계문화유산이다. 무엇 때문에? 이 절만이 갖고 있는 예술성 높은, 수많은 소조상(塑造像) 덕이다. 소조(塑造)는 나무로 기초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이것이 마르면 색을 칠하여 만든 조각 작품을 말한다.
쌍림사가 갖고 있는 소조상은 현란한 손동작을 하고 있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가장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위태상(韦驮像)과 자재관음(自在觀音) 등 무려 2,052점이나 된다. 이들은 천왕전, 석가전, 대웅보전, 천불전, 보살전 등 다양한 전각에 분산되어 있는데 큰 것은 높이가 3m에 달하고, 작은 상은 40~50cm 정도다. 그래서 쌍림사는 ‘채색 진흙조각예술의 보고’라고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더구나 쌍림사의 채색 소조상은 당(唐)나라 때를 시작으로, 송(宋), 료(遼), 금(金), 원(元), 명(明)나라 등 각 시대별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어 예술적 가치는 물론 귀중한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함께 갖고 있다. 쌍림사의 소조상들은 지금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다만 어떤 석상들은 세월의 먼지로 채색이 잘 안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먼지를 털어내면 채색이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어 그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쌍림사의 원래 이름은 중도사(中都寺)였다. 창건 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571년에 중수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최소 1,500년 이상 된 사찰인 것은 분명하다. 중도사는 송대(宋代)에 쌍림사로 개칭되었는데 석가모니가 입적할 때 뒤에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 평요고성


 

  유네스코는 1997년 평요고성(平遥古城)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심사를 하면서 깜짝 놀랐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옛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도 그렇다. 운남성의 여강고성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지금의 여강고성은 원래 주인이었던 나시족들이 상권을 잡은 외지인들에게 밀려나면서 지나친 상업화로 여행지로서의 매력을 급격히 잃고 있다. 여강고성은 평요고성과 함께 중국의 수많은 고성 중 유이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평요고성의 크기는 여의도의 5분의4 정도다. 높이 12m, 둘레 6km에 달하는 성벽 안에 중국의 전통가옥인 사합원이 무려 4천여 채나 명청(明·淸)시기에 만들어진 그대로 가득하다. 또한 평요고성에는 6개의 성문과 4개의 탑, 72개의 보루가 설치되어 있다. 무엇보다 평요고성이 매력적인 것은 5만 명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 문화재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평요고성이 옛 모습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오랜 세월동안 전쟁을 겪지 않은 천운이 있었기 때문. 중일전쟁(中日戰爭) 때 위기는 있었지만, 중국군이 평요고성에서 일찌감치 철수하면서 온전할 수 있었다. 산서성은 예로부터 상업 활동이 활발해 거상(巨商)이 많았다. 이들을 진상(晋商)이라 했는데 평요고성이 이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평요고성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가 일승창(日升昌)이다. 바로 진상들이 1826년에 설립한 중국 최초의 근대적 은행이다.
평요고성의 고풍스러움은 세계적으로 히트했던 애니메이션 ‘쿵푸팬더 2’의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제 5일   면산

  오늘은 하루 종일 면산에 머물며 도교 사원과 불교 사찰이 어우러진 웅장한 자연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마 중국인들만큼 절벽에 길을 잘 내고, 건물을 잘 짓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감탄 속에 오늘 그 진수를 보게 됩니다.

오늘의 이동거리와 예상 소요시간

평요고성-면산 1시간 40분(72 km)



• 면산



 

  면산(绵山)은 해발 2000m에 세워진 공중도시다. 이곳은 중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중국적인 스케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함께 보여준다. 면산은 중국의 명산 중 하나로,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이뤄진 협곡의 아찔한 절벽을 따라 무려 25km 구간에 걸쳐 도교사원과 불교사찰이 가득하다.
면산은 중국의 4대 명절인 한식(寒食)이 유래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춘추오패 중의 하나였던 진문공(晉文公)은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했던 개자추(介子推)가 면산에 은신하자 그를 불러내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다가 잘못 죽이게 된다. 이에 진문공은 크게 슬퍼하면서 성대히 장례를 치르고 이날만은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한 것이 바로 한식의 유래다.
이를 계기로 면산은 신성한 산으로 여겨지게 되고, 북위(北魏 386∼534) 시대를 시작으로 상당한 규모의 사원과 사찰이 들어섰다. 하지만 워낙 험준한 오지에 있던 터라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가 한 석탄 부호가 막대한 자본을 들여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면산은 중국의 5A급 여유경구가 되었다.
면산은 워낙 규모가 방대해 모든 곳을 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우리는 시간이 허용하는 한에서 면산의 하이라이트인 깎아지른 절벽에 세운 거대 도교 사원인 대라궁(大罗宫), 면산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운봉사(云峰寺), 12명의 등신불이 안치된 정과사(正果寺), 개자추를 기리는 사당인 개공사(介公祠), 멋진 트레킹 코스가 있는 서현곡풍경구(栖贤谷風景区) 등을 찾게 된다.






제 6일   왕가대원 - 황하호구폭포

  오전에 보게 될 왕가대원은 중국에서 가장 큰 민간집입니다. 아무리 부잣집이라도 우리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정말 중국의 스케일은 알아줘야 합니다.
황하호구폭포는 오지 중의 오지에 있습니다. 오가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좀처럼 가보기 힘듭니다. 이 기회가 아니라면 이 폭포를 일부러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황하의 심장이라 불리는 황하호구폭포는 그만한 노력을 들일 가치가 충분합니다.

오늘의 이동거리와 예상 소요시간

면산-왕가대원 40분(17 km)
왕가대원-황하호구폭포 3시간 30분(240 km)



• 왕가대원


 

  예로부터 산서성엔 유난히 거상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이 지은 거대한 저택인 대원(大院)도 여럿 남아 있다. 교가대원(乔家大院), 왕가대원(王家大院), 상가장원(常家庄园)이 대표다. 우리는 이 중 왕가대원을 찾는다. 유명하긴 교가대원이 가장 많이 알려졌다. 홍등이라는 영화에 무대로 등장해서다. 하지만 가장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왕가대원이 사실상 모든 곳을 압도한다. 규모가 교가대원의 4배다.
얼마나 큰 지 왕가대원은 ‘민간의 자금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부지만 따져도 황제가 사는 자금성의 3분의1이 넘는다. 황실의 가족이 사는 자금성의 내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상단의 상인들과 일꾼이 함께 거주한 왕가대원엔 113개의 정원과 무려 1,118칸의 방이 있어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한다.
중국 역대를 통틀어 가장 큰 민간 집인 왕가대원의 역사는 약 600여 년 전의 인물인 왕실(王实)에서 비롯된다. 그는 두부와 소금을 팔아 거부가 되었다. 이어 그 후손들이 큰 벼슬에 오르면서 왕실의 집안은 명청시대의 4대 명문가가 되었고, 왕가대원 역시 이후 300여 년 간이나 증축을 거듭, 오늘날 보게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가 되었다.
왕가대원은 중국의 전통 가옥인 사합원(四合院) 구조를 갖고 있다. 마당이나 정원을 가운데 두고 4개의 건물들이 'ㅁ'자 형태로 배치된 가옥을 말한다. 자금성과 똑같은 10m 높이의 담 안에 수많은 사합원이 위계질서와 장유유서, 남녀유별의 유교적 전통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구획되어 있다.
중국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왕씨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남겨 놓은 왕가대원은 놀랍도록 완벽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황하호구폭포


 

  중국 사람들은 황하를 '황하모친(黃河母親)'이라 한다. ‘어머니 강’이라는 뜻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의 중국을 이루는 황하문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황하는 티베트고원에서 발원해 청해성, 산서성, 산동성 등 무려 10개의 성을 지나 황해로 흘러든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강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무려 5,464km를 흐르는 동안 폭포가 단 한 개밖에 없다. 바로 우리가 갈 황하호구폭포(黄河壶口瀑布)다.
호구폭포는 섬서성과 산서성의 경계에 있다. 이 부근의 황하는 보통 300m 너비로 흐른다. 그러다가 호구폭포 근처에 이르러 갑자기 그 폭이 20~30m로 좁아진다. 온통 바위투성이라 물길이 다른 데로 갈래야 갈 수도 없다. 이 곳에서 황하는 마치 주전자로 끓은 물을 붓 듯, 정말 격렬하게 쏟아져 내리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황톳빛 물보라를 일으킨다.
이 같은 모습에서 ‘주전자의 주둥이(壶口)’라는 뜻의 폭포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이 격동적인 모습에서 호구폭포는 황하의 심장이라고도 불린다. 호구폭포는 중국에서 귀주성의 황과수폭포(黄果树瀑布)에 이어 그 다음으로 큰 폭포이며, 광시좡족자치구의 덕천폭포(德天瀑布)와 더불어 중국의 3대 폭포다.
사실 호구폭포는 외진 곳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호구폭포 앞에 서면 긴 이동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을 것이다. 괜히 중국 정부가 선정한 ‘중국의 아름다운 여행명승지 40처’ 중 하나가 아닌 것이다.






제 7일   황성상부 - 정주

  하남성(河南省)의 성도(省都)인 정주(郑州)에는 우리나라를 연결하는 직항 항공편이 있습니다. 정주 가는 길에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인 황성상부를 들르게 됩니다. 왕가대원과는 맛이 전혀 다른 대저택입니다.
황성상부를 본 후에는 정주로 이동, 마지막 숙박을 합니다.

오늘의 이동거리와 예상 소요시간

황하호구폭포-황성상부 4시간(279 km)
황성상부-정주 2시간 40분(172 km)



• 황성상부


 

  황성상부(皇城相府)는 청나라의 명재상(名宰相) 진정경(陈廷敬)의 대저택이다. 원래 이름은 중도장(中道庄)이었다. 하지만 강희제(康熙帝)가 이곳에서 두 번이나 머물렀다. 그래서 ‘황제의 성’이라는 의미의 皇城이 앞에 붙게 되었다. 뒤의 相府는 ‘승상의 집’이라는 뜻이다.
강희제가 누구인가? 그는 청(淸)은 물론이고 중국 역대 통틀어서도 가장 위대한 황제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는 한족으로부터 진정한 마음을 얻기 위해 누구 보다 많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고, 서양을 알기 위해 라틴어까지 섭렵한 인물이다. 그런 명군이 스승으로 삼은 인물이 진정경이다. 그리고 무려 50년간이나 자신의 곁에 두었다. 중국 사전의 대명사이자 중국 문화사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을 편찬한 인물이 바로 진정경이다.
황성상부는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체 면적이 약 11,000평 정도다. 이를 1.7km 길이의 높은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데 약 640칸의 방이 있다. 황성상부엔 진정경 뿐 아니라 진씨(陈氏) 일족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는데 각각 황성상부내의 여러 집에 나뉘어 직계단위로 독립된 생활을 하였다. 진정경이 건립한 외성의 어서루(御書樓)에는 지금도 강희제가 내린 오정산촌(午亭山村)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진정경은 지금도 청백리(淸白吏)로, 그리고 관리의 표본으로 중국에서 추앙받고 있다. 그가 이런 거대한 저택을 갖게 된 것도 재상 벼슬을 해서가 아니라 진씨 가문이 오래전부터 거상(巨商)이었던 덕이다. 많은 사합원과 정원, 성루와 탑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황성상부는 국가가 선정한 5A급 여유경구다.






제 8일   정주 - 인천

  오전에 정주를 출발해 오후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 여행을 마치게 됩니다.